정성을 끊인 음식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것이 의식주입니다. 각 지역과 민족에 따라 그 지역의 고유한 형태의 의식주 문화를 형성하며 인류는 생존하여 왔습니다. 물론 인접한 이웃 나라와는 문화적 교류를 통해 유사한 문화적 공통분모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그 민족만의 독특한 의식주 문화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웃한 중국과 일본과 문화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도 있습니다. 의식주 문화 중에서 인접한 나라와는 구분되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옷 중에서 한복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의 고유한 의복이고, 주거문화 중 온돌은 우리 민족만이 가지는 가장 독창적인 난방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음식은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보신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개고기는 우리뿐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에서도 식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식재로가 아닌 조리방법 중에서 푹 고아서 만든 음식이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고기나 뼈 따위를 무르거나 진액이 빠지도록 끓는 물에 푹 삶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고는 것은 단순히 삶아서 익히는 것과는 구분이 됩니다. 음식에 열을 가하여 조리하는 방법에는 굽고, 튀기고, 삶고, 찌고, 볶고, 훈제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모두 단순히 음식을 익히거나 데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푹 굽거나 푹 튀기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삶는 것에 진일보하여 푹 삶아서 고아먹는 음식문화를 만들었습니다. 한국말 ‘고다’를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마 딱히 한마디 외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영국에서 생활 할 때 닭백숙을 해 먹을 때 함께 사는 스위스, 스페인 친구들이 다 익은 닭을 계속 삶아서 익힌다고 저를 바보라고 놀린 적이 있었지만, 백숙 국물 맛을 보고나서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 했습니다. 한국 음식하면 으래 맵고 짜고 강한 양념만을 생각하던 그들에게 담백한 백숙은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인가 삶으면 익힌 음식물만 먹고 삶은 물은 버리는 그들의 통념으로는 다 익은 닭을 또 삶고, 삶고 난 물을 버리지 않고 닭과 함께 먹는 백숙이 이상해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리가 고아서 먹는 음식들은 몸보신이나 원기 회복을 위한 음식들이 많습니다. 제가 의학 분야나 영양학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 뭐라 단정 지어서 말 할 수 는 없지만, 푹 고아서 먹는 조리방법은 우리 민족이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낸 최고의 웰빙식 조리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약은 조금 다르게 다려 먹는다고 하지만 넓게 보면 한약재를 푹 고아 먹는 게 아닐까요? 푹 고는 조리 방법은 오랜 시간동안 불을 지켜야 하는 사람의 정성까지 함께 담겨져 있어 건강에 더욱 좋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 어불성설이 되어버릴까요? 물론 먹거리가 부족해서 가축의 뼈조차 버리지 못하고 음식재료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푹 고아먹는 조리법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푹 고을 수록 깊은 맛이 더 우러날 뿐만 아니라, 좀 더 큰 솥에 좀 더 많은 재료를 넣고 끊일수록 더 맛이 좋아 진다는 것입니다. 고아 먹는 음식은 나 혼자만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나누어 더불어 다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줄 아는 우리 민족의 훈훈한 인심이 고아 먹는 음식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오래 고아서 우러난 뽀얀 국물이야 말로 우리 민족 그대로의 본 모습일 것입니다. 이웃 간의 담이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높아만 가는 현대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생각하면 어렵지만 함께 나누며 살아온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더욱 돋보입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경기가 좋지 않아서 힘들고 어렵다는 분들이 유달리 많습니다. 며칠 전에는 밀가루 값 폭등으로 서민들의 필수품인 라면 값도 오른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힘든 요즘에 만드는 이의 정성을 함께 넣고 푹 끊인 백숙이나 곰국 한 그릇 먹고 다 같이 힘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섰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는 돼지 뼈를 푹 고아서 우려낸 순대국 한 그릇에 온갖 근심 걱정 함께 넣어 휘휘저어 소주 한잔 마시고 웃으면 어떨까요? 지난겨울 가까운 지인이 보내주신 김장 덕에 올해 겨울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빈 김치 통에 뭘 담아 보낼까 걱정이었는데, 사골이라도 푹 고아서 뽀얀 국물에 제 정성까지 함께 넣어서 보내 드려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십정동 도축장에 바람 쏘이러 나가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