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생활문화의 특성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을 꼽으라면 단연 퓨전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우리 생활 곳곳에 깊숙이 파고든 퓨전문화는 이제 우리 생활과는 때려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친숙해져버린 지 오래다. 동네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 퓨전요리점을 필두로 광고, 의류, 디자인, 영화 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퓨전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세대를 가히 퓨전시대에 살아가는 퓨전세대라 불러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원래 퓨전의 어원은 라틴어의 “fuse (썩다)” 라는 뜻으로 영어식으로 표현되어 “fusion" 이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나 조화를 통해 전혀 새로운 요소를 재탄생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의 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융합되어 전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이고,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문화를 퓨전문화라 할 수 있다. 비단 동. 서양 문화의 융합이나 전통과 현대 문화의 조화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문화 영역 내에서 장르와 장르 간 요소들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내기 위한 노력들이 꾸준히 경주되고 있다.
하나의 물방울이 시내를 이루고, 그 시냇물이 만나 큰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바다에서 만나듯 각각의 문화적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퓨전문화는 21세기 문화흐름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우리 서예도 이러한 문화적 흐름에 발맞추어 현대서예란 이름으로 많은 서예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시도들이 진행되어져 왔다. 비단 서예뿐만 아니라 서예가의 붓끝을 빌어 태어나는 문인화도 다양한 기법과 소재의 접목을 통해 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시도되어왔다.
지난 7월9일에는 인천에서 활동하시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정 강희산 선생님의 다섯 번째 개인전인 “有恒”전이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대나무와 난초등 사군자뿐 아니라 그간 야정선생님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감과 모란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소재를 화폭에 담아낸 문인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캔버스위에 황토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소나무와 국화등 다양한 소재를 표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였다. 또한 닥종이 위에 펼쳐진 문인화 작품도 눈에 띄었다. 필자에게는 야정 선생님의 그동안의 각고의 노력과 작품창작을 위한 야정 선생님의 고뇌를 한자리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야정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필자의 머리를 가득 메운 것이 바로 퓨전이었다. 이것과 저것을 썩어놓으면 어떤 것이 탄생 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순수한 호기심과 끝없는 탐구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퓨전문화에서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 문화의 장르만이 지니는 고유한 문화정체성이다. 서예와 문인화에 다양한 기법과 소재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한 시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서예의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린 작품을 과연 서예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예가의 손끝을 통해 완성된 모든 작품을 서예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서양화를 그리는 분이 붓을 들고 써내려간 작품은 서양화인가 아니면 서예작품인가?
이제 갓 서예에 입문한 필자의 좁은 시각으로 퓨전문화가 넘쳐나는 오늘날 서예의 범주를 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작가의 붓질을 느낄 수 없는 작품은 서예작품이나 문인화가 아니라고 감히 단정 짓고 싶다. 붓을 얼마나 힘차고 세련되게 운필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에서 붓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라도 좋고, 어느 소재를 사용하여도 좋고, 무엇을 쓰고, 어떤 대상을 표현하더라도 그 작품에서 작가의 붓질을 느낄 수 있느냐가 서예작품의 가부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되어야 할 것이다. 간혹 현대 서예작품 중에 붓질은 간데없고, 화선지위에 먹물의 번짐만을 통해 표현한 작품들을 보게 된다. 이는 필시 먹물과 화선지를 이용한 회화작품이지 결코 서예작품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좁은 소견이다.
좀처럼 화려하지 않으면 눈에 띄기도 힘든 세상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흑백의 단순함만으로 표현하는 서예작품이나 담백한 맛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문인화는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의 시류를 따른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서예의 퓨전화를 선도하는 서예가들은 퓨전서예가 서예의 범주를 넘어서거나 자칫 천박해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요소의 접합이 억지스럽지 않고 보다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복잡하면 할수록 더 단순해 지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더욱 고달파지게 마련이라는 것이 필자의 삶의 방법이다. 고전 법서의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와 내 색깔을 내기위해 더욱 열심히 기초 서예공부에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전시장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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