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여운 여인” 을 보다 남자 주인공의 피아노 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 뒤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서예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 간지도 조금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간혹 가훈을 써 달라는 부탁도 받고, 동네 축제 때에도 가훈 쓰기 행사에 참석을 하곤 합니다. 내 생각에 가훈이란 한 집안의 가치판단의 중심이 되는 그 집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 집안의 정신을 문자를 빌어 표현한 것이 가훈이지 싶습니다.
가까운 지인 분들에게 가훈을 써 주면서 정말 많은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부탁하신 가훈을 한 달 가까이 쓰고 또 써서 갖다 드렸습니다. 당신 자신이 잘 아는 분이 액자 집을 하신다기에 그냥 봉투에 넣어서 사무실로 가져다 드렸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사무실에 들렀다가 제가 넣어드린 봉투 그대로 있는 걸 보고는 그냥 봉투째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꼭 직접 표구를 해서 가져다 드립니다. 또 한 분께는 하도 작품 하나 써 달라고 조르셔서, 표구해서 갔다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넌 도대체 액자 값을 얼마나 받아서 그 분이 술 마시며 너한테 바가지 썼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15만원 은행에서 찾아서 그분께 가서 돈 드리고 작품을 다시 받아 온 적도 있습니다. 그때 작품을 찾아오면서 나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남에게 뭐 써주지 말아야지, 나름대로 온 정성을 다 해 작품 써드리고 바가지 씌웠다는 욕은 먹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네 축제 때 무료로 가훈 써주기를 하면서 보면 참 붓글씨를 쓰는 제가 한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나름 정성을 다해 써드린 가훈 글씨가 행사장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걸 볼 때는 조금 마음이 상합니다. 또 어린이와 함께 손을 잡고 오신 부모님들 중에 “ 우리 집 가훈은 뭐로 할까?” 하면서 자신의 자녀에게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가훈을 물어보는 부모님들을 볼 때면 저 분들에게 가훈이란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에 먼저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쇼핑을 나온 것처럼 자녀에게 골라보라고 권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써드리기 싫다는 느낌을 넘어 어이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가끔 지인들이 부탁하는 가훈을 쓸 때면, 이런 말을 쓰고 있는 나는 어떤가하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은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가끔은 좋은 글을 쓸 때마다 그렇게 살지도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가끔 술자리를 함께 하는 거래처 사장님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집사람 푸념을 하면서 간곡히 부탁하셔서 공짜 술 얻어먹은 죄로다 써드린 가훈입니다. 가훈을 사무실에 가져다 드리니 고생했다며 좋아 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집니다. 그리고 다음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겠다는 너무나 감사한 약속에 더 행복해졌습니다. 아이들과 집사람 잘 보는 TV 위에다 꼭 걸어 두어야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그 분을 뵐 때, 글씨 쓰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붓 고른 김에 딸 셋을 낳고서 기어이 넷째에서 아들을 본 친구 집에 가훈도 써 봅니다. 병원에서 넷째는 아들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아들이 있는 집에 가훈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며 노래를 불러온 터라 이참에 써 주었습니다. 딸 셋 손 잡고 마트가면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는데, 딸 셋에다 배부른 아내까지 함께 마트에 가면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럽다는 친구입니다. 왠지 액자 값을 떼일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후에 친구의 아들이 내는 국민연금으로 생활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써 주었습니다. 자신이 아들에게 꼭 이야기 하고 싶다던 가훈을 바라볼 친구를 생각하면서 정성들여 쓴 작품인데 친구가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팔둘레 형님이 부탁하신 “배려하는 삶” 이란 가훈도 써드려야 하는데, 요즘은 틈이 잘 안 나네요. 최소한 1주일은 금주 모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너무나 좋은 가훈이라서 꼭 제가 쓰고 싶은데....... 쌀쌀한 찬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소주 일잔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너무 힘든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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