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청외 조경준 선생님 개인전을 다녀와서

감포 2009. 2. 16. 16:39

청외 조경준 선생님 개인전을 다녀와서


                                              감포 김현수

   1. 개인전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봄을 재촉하는 안개가 자욱한 2월의 첫 번째 주말에 인천신세계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청외 조경준 선생님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나 역시 현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서예공부를 하고 있는 아마추어 서예가이기에 서예를 전문 직업으로 가지고 계시는 프로 작가들의 개인전과는 달리 아직도 현업에서 의사로 일하시며 서예가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청외 선생님의 개인전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저녁약속이 없는 날 직장에서 퇴근 후 틈틈이 붓을 잡고 화선지를 메워가는 나로서는 개인전 준비를 위해 청외 선생님이 서예공부에 쏟아 부은 노력과 시간에 한없는 찬사를 보낼 뿐이다. 사람이 한 가지 일도 잘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서예공부가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서예공부에 좀처럼 진전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일이면 일, 서예면 서예 모두 이처럼 훌륭히 해내시는 청외 선생님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다.


사실 난 의사란 직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TV 드라마가 모두 사실은 아니라고 해도, TV 드라마 속에 비쳐진 의사란 직업은 한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대부분의 작품들이 2008년 무자년에 쓰신 작품들이라 현직에서 의사로 일하시면서 개인전을 준비하셨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히 전시장에서 만난 청외 선생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전서로 쓰여 진 대형 임서작품들은 청외 선생님이 아예 현업인 의사를 그만두시고 서예공부에만 전념하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서예공부에 대한 청외 선생님의 남다른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의 장르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2006년 12월에 개봉해서 코믹 영화로는 드물게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이와 같은 흥행을 점치는 전문가들은 없었다고 한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 가수가 성형 수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자신이 외모로 인해 받은 수모를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외모자상주의를 코믹하게 꼬집으면서 자신의 생긴 겉모습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외모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으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과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하는 시늉만하는 미모의 여가수들을 위해 뚱뚱하고 못생긴 여주인공이 무대 뒤 어두운 구석에서 목이 터져라 열창하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황금만능의 시대인 동시에 잘생긴 외모가 그 사람의 성공에 가장 큰 변수가 되는 외모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풍성하게 가꾸어 가는 수련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신 예술인 서예가 대중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물질만능 시대에 붓을 잡고 있는 나로서는 행여 서예조차도 돈이면 만사 거칠게 없을 것이라는 배금주의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예술의 최고봉에 있는 서예가 오늘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자기 성찰의 시간도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인 짧은 견해로 보고 듣고 느끼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모두가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청외 선생님의 이번 개인전은 나를 포함해 전시장을 들러본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준 청외 선생님의 붓질 혹은 작품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시간 중에 의사로서 현업에서 열심히 일하시면서 남은 시간을 알뜰히 쪼개서 서예공부에 매진한 청외 선생님의 삶 자체만으로도 전시장을 찾은 모든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청외 선생님처럼 전시장을 찾는 모든 분들께 어떤 형태로든 깊은 영혼의 감동을 줄 수 있는 나의 첫 개인전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전시장 문을 나선다.


2./ 농산 정충락 선생님의 평론을 읽고 나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판소리에 “귀명창이 명창을 낳는다.” 란 금언이 있다. 귀명창이란 판소리의 멋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훌륭한 청중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귀명창은 판소리의 청중인 동시에 비평가이다. 이 금언은 훌륭한 예술가와 그가 펼치는 예술의 탄생에 있어 관객과 비평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붓을 들고 펼치는 서예에서도 훌륭한 서예인과 서예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서예에 대한 올바른 평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 글을 쓰는 솜씨도 없을 뿐더러, 미술이나 서예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서예평론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전시장에서 청외선생님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농산 정충락 선생님의 “문자의 연원을 찾아서” 란 제목으로 쓰여 진 청외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읽고서 서예평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지극히 짧은 필자의 생각으로 서예평론이란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의 바탕위에서 평론가의 주관적인 사상과 심미안을 통해서 바라본 서예작품에 대한 평가를 글로써 써내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전 서예작품의 도록에 실린 서예평론은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에게는 서예작품의 바른 감상 방법을 제시해주는 훌륭한 교과서인 동시에 작가들에게는 서예공부의 나아갈 방향을 세워주는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을 것이다.  판소리의 귀명창과 같이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의 매력이나 단점조차도 평론가의 세심한 눈으로 지적을 함으로서 전시장을 찾은 관객의 감상의 눈높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창작을 하는 작가의 수준 역시 진일보 시켜 서예발전과 서예의 저변확대에 반드시 필요한 자양분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모든 문화예술에 대한 평론뿐 아니라 서예평론에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치열한 시대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창암 이삼만은 서예작품보다는 작가의 신분이 더 중요시 되던 시대를 살았기에 중인 계층이었던 그의 작품은 당대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없어진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서예가로서의 창암 이삼만과 그의 작품에 대한 바른 평가와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농산 선생님은 평론 본문에서


왜냐하면 그의 솜씨는 일찍이 검정된 바가 있는데, 그것이 인천지역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서예를 모르는 일반인도 아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평론가이시지만 이 소리는 정말 작금의 서예가 흘러가는 방향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신 말씀 같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서예대전의 심사에서 상을 받기위해 검은 뒷돈이 오가고 대회를 주최했던 분들이 줄줄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 방송과 유력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경찰이 괜한 짓을 해서 중앙의 서예공모전에서 상을 받기 위한 가격만 올려버렸다는 볼멘소리가 작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 역시 인천지역 서예공모전에 부지런히 작품을 출품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청외 선생님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서예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신 분들과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묻고 싶다. “인천지역 공모전에서 대상수상으로 그 작가의 서예 솜씨가 검증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당당하게 “예” 라고 답하실 분이 몇 분이나 될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하루빨리 모든 분들이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 바랄 뿐이다.



아래의 말들은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의 농산 선생님 평론을 읽어본 필자의 눈에 띈 말들이다.


書者, 검정, 문자문화, 始終運墨, 間架, 濃熱하다, 一子作 ,多子作, 書業, 學書, 서사하다


도대체 이 말들은 어느 나라 말인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국어사전에 검색을 해 보았다. “농열하다”, “서업”과 같이 아예 검색결과가 없는 말들도 있고 “서자”, “검정” 과 같이 사전적 의미가 전혀 맞지 않는 말들도 있다. 앞서 서예평론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서 밝혔듯이 평론은 서예발전을 위해 작가뿐 아니라 서예를 감상하는 일반인들에게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국적도 불분명한 어려운 말들로 가득 채워진 평론을 누가 읽고 이해를 하겠는가? 간혹 서예 월간지에 실린 서예평론들을 읽다보면, 마치 어려운 한자를 많이 쓸수록 훌륭한 평론이라도 되는 듯 국적조차 불분명한 한자 조어들이 여기저기 넘쳐난다.


비단 서예평론이 아니라도 모든 글에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꼭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중의 기본 원칙이다. 간혹 주위에서 대화하는 중에 마치 자신의 무식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어려운 전문용어나 국적불명의 외국어를 남발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된다. 서예평론가는 서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자신의 주관적인 사상과 서예작품을 감상하는 남다른 심미안뿐만 아니라 서예평론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력까지 겸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예술에 관한 평론을 쓰더라도 전문 용어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예평론에 국적조차 불문명하고 국어사전에 조차 나오지 않는 말들이 넘쳐난다면, 서예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은 물론 서예인들 조차 쉽게 서예평론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급속한 성장 제일주의를 외치며 정신없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이제는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숨 가쁘게 질주하는 대한민국에서 이제 속도는 하나의 생존전략과도 같다. 대중예술도 쉽고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실정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아직은 작지만 느림의 미학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서예가 느림의 미학이란 시대적 흐름을 타고 일반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편안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대중들이 서예는 어렵고 고리타분할 뿐 아니라 나이든 분들이나 하는 예술이란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서예평론은 보다 쉽고 편안하게 서예의 미학으로 일반인들을 안내해 주는 지침서로써의 역할을 다하여 할 것이다. 

 

호랑이는 굶어 죽을지언정 풀을 뜯어 먹지 않는다. 농산 선생님이 평론 말미에 언급한


“서사하는 현장에 있지 않아서 확실할 것인지는 의문이나......”

 

하는 문장은 서예평론가로서 자신의 평론에 대한 마지막 양심의 소리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농산 선생님 평론의 요약평인 칠언절구의 한시와 그에 대한 작가의 반응에 대한 궁금증으로 서예평론을 마치셨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농산 선생님의 한시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개인적으로 참으로 궁금하다. 칭찬과 비굴한 아부는 종이 한 장의 차이다. 서예평론이 음으로 양으로 서예발전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예가와 작가의 서예작품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평이 되어야 한다. 서예평론을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칭찬도 좋지만 때로는 거침없는 쓴 소리조차 아끼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작가뿐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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